심리학에는 아주 오래된 한 가지 논쟁이 있는데 '억압된 기억'이라는 주제가 그러합니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의 시초인 프로이트에 의해서 주장이 되었으며, 기억을 연구하는 학자들과 임상가들 사이에 '기억 전쟁'이라고 부를 정도로 뜨거운 논쟁이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억압된 기억'이란 무엇이며, 심리상담사들에 의해 기억이 왜곡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사례) 한 청각장애인 여성이 남편과 이혼하려는 문제를 상의하고자 상담을 신청하였습니다. 이 부부에게는 6살 된 딸이 있었는데 언제부터 이따금 "내 몸에 벌레가 있어요"라고 말하였습니다. 소녀의 어머니는 남편이 딸을 목욕시키면서 장난스럽게 벌레를 잡는다는 핑계로 딸의 몸을 더듬으며 몹쓸 짓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 여성의 남편이 집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잠시 담배를 사러 나간 사이에 남편 친구가 이 여성을 겁탈하려고 시도하였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이 여성은 완강히 저항하였는데 당황한 남편의 친구는 남편이 내기 도박에서 진 빚을 갚는 조건으로 아내와 관계를 맺어도 된다고 말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충격을 받은 여성은 남편과 심하게 싸우고 이혼하기로 결심하여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성의 청각장애인 남편도 상담하게 되었는데 그는 친구가 아내를 겁탈하려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은 단지 담배를 사러 나간 것뿐이고 이후로 그 친구와 관계를 완전히 끊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기 때부터 딸의 목욕을 자신이 직접 해주었는데 언제부터 딸이 목욕하지 않으려고 해서 벌레놀이를 한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여성과 몇 차례 상담이 이어지면서 여성의 아버지가 의붓아버지였으며, 남편이 딸을 목욕시키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어렸을 때 의붓아버지로부터 성추행당한 것을 기억해 냈습니다. 이 여성은 그동안 그런 기억이 없었는데 남편의 모습을 통해서 갑자기 성추행당한 기억이 떠오른 것입니다.
✼ 억압된 기억인가? 기억의 왜곡인가?
이 여성의 사례처럼 일부 여성 중에는 자신이 성추행당한 기억이 없다가 갑자기 과거의 사건이 떠올라 어렸을 때 자기를 성추행한 사람을 기억해 냅니다. 이것을 '억압된 기억'이라고 하는데 많은 사람은 그것이 신빙성있는지 의심하였습니다. 1990년대 미국의 조지라는 남자가 살인범으로 기소되었는데, 그의 딸이 심리치료를 받은 후에 갑자기 20년 전 아버지가 친구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기억이 떠올랐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법원에서 이 사건을 의뢰받은 기억연구가인 엘리자베스 로프터스 교수는 이것이 심리치료사에 의해 기억이 조작되거나 왜곡되었다고 이의를 제기하였고 결국 조사에 의해 조지는 무죄로 석방되었습니다. 로프터스 교수는 쇼핑몰에서 미아가 된 적이 없는 아이에게 엄마를 통해 기억을 조작하면 아이가 실제로 미아가 된 적이 있다고 믿는 모습을 실험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에 더해 2002년 뉴질랜드의 심리학 교수인 스테판 린드세이는 열기구를 탄 적이 없는 사람에게 가족의 도움을 받아 유년 시절의 사진에 열기구를 탄 것처럼 합성하여 보여주면 절반에 달하는 사람이 정말 자신이 열기구를 탄 것처럼 회상하였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이처럼 기억이 누군가에 의해 조작될 수 있음이 실험으로 증명되자 대중은 '억압된 기억'은 허구이며, 심리치료를 하는 상담사들을 향해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며 비난을 쏟아내었습니다. 이들의 주장처럼 정말 심리치료사들이 내담자의 기억을 왜곡하는 걸까요?
✼ 아동기 부정적 경험
심리학에서는 장기 기억의 한 형태로 '암묵 기억'에 대해서 말하는데 이것은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지만 과거의 경험이 후에 행동이나 정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합니다. 미국에서는 1995년부터 질병통제예방센터를 중심으로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과 성인기의 주요 질병과의 연관성을 밝히는 연구를 시작하였고, 2008년부터는 ACE(Adverse Childhood Experiences)설문 문항을 포함하였습니다. 이 ACE 문항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Did you feel that you didn’t have enough to eat, had towear dirty clothes, or had no one to protect or takecare of you?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거나, 더러운 옷을 입어야 하거나, 귀하를 보호하거나 보살펴줄 사람이 없다고 느꼈습니까?)
•Did you lose a parent through divorce, abandonment,death, or other reason? (이혼, 사별, 유기 또는 기타 이유로 부모님을 잃었습니까?)
•Did you live with anyone who was depressed, mentallyill, or attempted suicide? (우울증, 정신질환을 앓거나 자살시도를 한 사람과 같이 살았습니까?)
•Did you live with anyone who had a problem withdrinking or using drugs, including prescription drugs?(음주, 마약 또는 처방약 남용 등의 문제가 있는 사람과 같이 살았습니까?)
•Did your parents or adultsin your home ever hit,punch, beat, or threaten to harm each other? (같이 사는 부모님이나 어른이 서로를 구타하거나 협박한 적이 있습니까?)
•Did you live with anyone who went to jail or prison? (전과자와 같이 살았습니까?)
•Did a parent or adult in your home ever swear at you,insult you, or put you down? (같이 사는 부모님이나 어른이 귀하에게 욕설, 모욕하거나 비하한 적이 있습니까?)
•Did a parent or adult in your home ever hit, beat, kick,or physically hurt you in any way? (같이 사는 부모님이나 어른이 귀하를 때리거나, 발로 차거나, 신체적으로 아프게 한 적이 있습니까?)
•Did you feel that no one in your family loved you orthought you were special? (귀하를 사랑해 주거나 특별히 여기는 가족이 없다고 느꼈습니까?)
•Did you experience unwanted sexual contact (such asfondling or oral/anal/vaginal intercourse/penetration)? (원치 않는 성적 접촉 애무 또는 구강, 항문, 질성교, 삽입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2009년부터 세계보건기구(WHO)는 표준화된 조사 체계를 수립하여 세계적으로 아동기 부정적 경험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그 결과 주요 만성질환인 심혈관질환, 제2형 당뇨병, 간 또는 호흡기질환은 아동기에 부정적 경험을 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3.05배 높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이 아동의 신체와 인지, 정서, 사회성 발달에 영향을 주어, 향후 심리적이고 행동적인 문제를 유발하고, 이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결하기 위해 음주, 흡연, 약물복용 등의 부정적 건강 행위들을 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성인기 이후의 만성질환에 걸릴 위험 역시 증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현실은 어떠한가?
보건복지부는 2023년에 아동학대 연차 보고서를 발간하였는데, 2022년에 우리나라에 아동학대로 신고된 건은 46,103건이며, 아동학대로 판단된 사례는 27,971으로 이 중 82.7%가 부모에 의한 학대라고 보고하였습니다. 학대를 받은 아동의 50명은 사망한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40년간 정신과 전문의로 일한 어느 의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직도 환자들이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면 속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야'라고 말하는 내 목소리가 자주 들린다. 이야기하는 당사자도 나만큼 의아해하는 경우가 많다. 대체 부모가 어떻게 자기 자식에게 그런 고문을 행하고 공포를 안겨 준단 말인가?" 2012년에 조사한 미국의 면허를 보유한 임상심리학자의 63%는 '억압된 기억'을 실제라고 믿으며, 조사 대상의 89%는 유년기에 성적 학대와 같은 기억이 수년 동안 차단 될 수 있다고 응답하였습니다. 2019년 네덜란드의 아동보호 종사자의 89%는 외상성 기억이 억압된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미국 정신의학 협회에서는 '억압된 기억'이라는 용어 대신 '해리성 기억상실'의 범주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DSM-5(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편람)에서는 자살과 같은 파괴적 행동이 '해리성 기억 상실'을 보이는 개인에게서 나타나는데 기억 상실이 갑자기 회복되고, 감당하기 힘든 기억으로 개인이 압도되면 자살 시도와 같은 위험이 증가한다고 기술하였습니다. 이처럼 '억압된 기억'은 여전히 많은 정신건강 전문가 사이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마치면서
기억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주장처럼 일부 비윤리적인 심리상담사나 심리치료자가 암시적으로 치료적 개입을 하여 기억을 왜곡시키고 거짓 기억을 만들어낼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회복지와 임상심리 현장에서는 개인이 직면해야 할 두려움으로 인해 자신의 경험을 감추려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임상심리사는 치료에서 기억이 왜곡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억압된 기억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고통을 받는 사람이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직면하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심리학에서 여전히 논쟁이 진행 중인 '억압된 기억'에 대해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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